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 작가들은 진심으로 독자를 믿는다. 그들에게 그런 믿음이 없다면, 어떤 슬픔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는 화자, 자기와 꼭 들어맞지 않는 세계 속에 자기의 고유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주인공을 등장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가 이해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삶을 소망하는 사람이 이 세계에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하고 그가 분명 내 책을 읽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야만 작가는 포기하지 않는 인물을 그리고, 희망 없이도 포기하지 않는 능력에 대한 철학을 펼칠 수 있다. 그렇다면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말하는 책이 포기하지 않는 독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반대이다. 혹은 용감한 독자와 용감한 책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릴케의 시구처럼 우리는 책에서 자신의 그림자로 흠뻑 젖은 것들을 읽는다.

🔖 올랜도 역시 자기만의 인생을 찾아 여러 곳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본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은 소중하지만 자신이 짜 넣을 인생의 무늬들이 모두 관계로만 환원된다고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올랜도는 고독을 사랑하는 실존주의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 "여기서 전기작가는 그가 굼뜬 것이 그가 종종 고독을 사랑하는 성향과 짝을 이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서랍 상자 따위에 걸려 넘어지는 올랜도는 당연히 고독한 장소나 광활한 전망들을 좋아했고, 자기가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혼자라고 느끼기를 좋아했다."

🔖 1970년 첼란이 추격 망상에 시달리다 센강에 몸을 던져 죽은 1년 뒤, 그녀는 소설 「말리나」 에서 주인공의 목소리를 빌려 이렇게 썼다. "내 삶은 끝났다. 압송 도중 그가 그만 강에 빠져 죽었으니까. 그가 내 삶이었으니까. 나는 그를 내 삶보다 더 사랑했다." 이것은 개인적 고백인 동시에 문학적 고백이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고통과 위로할 길 없는 슬픔을 한 사람에게서 감지하고 그를 마지막 순간까지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바로 문학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안간힘이 사라질 때 문학은 끝난다. 그래서 문학은 한없이 다정한 일이지만, 또 비명이 나올 만큼 끔찍한 일이다. "달이 터진 쓸개를 담은 항아리를 들고서 찾아온다 / 그러나 그대의 몫을 마시어라. 쓰디쓴 밤이 내린다."(「진실한 것은」)

🔖 시인이 선택한 하나는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관심의 밸브를 잠가버리라고 썼지만 사실 그 선택을 통해서 더 중요한 것들로 향하는 관심의 밸브를 열어놓은 셈이다. 그녀는 반려견 카를로와 산책하면서 발견한 버섯과 꽃들과 민트색의 알을 낳는 로빈새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는 뭐든 카를로와 얘기해"라고 썼다. 그러곤 보고 느낀 것들을 시로 써서 친구들에게 보냈고 받는 이를 위해 시들을 조금씩 바꾸기도 했다. 에밀리는 시가 다른 사람들과 삶을 나누는 방식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출판의 형식을 빌려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았다.
그녀의 시는 대시dash로 가득하다. 시어들이 구슬처럼 대시에 꿰어져 있다. 한 단어는 다른 단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대시 안에서 충분히 쉬고 있는 것 같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이 요구하는 속도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의 속도로 단어에 머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춤추는 별을 탄생시키기 위해 사람은 자신들 속에 혼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대낮에는 별들이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기존의 가치들을 대낮처럼 환한 진리라고 믿는 사람은 어떤 별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 결과로 생겨나는 혼돈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제 안에서 춤추는 별을 찾게 된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라. 심지어 행복을 원하는 마음까지도. 니체는 춤추는 별을 언급한 다음, 행복을 찾아다니는 것은 비천한 인간의 일이라고 덧붙인다. 행복이 현대인을 지배하는 새로운 신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라 아메드는 「행복의 약속」에서 우리가 행복이라는 관념 아래 특정한 삶의 방식을 강요당한다고 말한다. 행복이 지배의 기술이 되었다는 것이다.